[선교] 타지키스탄 철수보고와 안식년 기도요청

  • 정광원
  • 작성일2019.01.18
  • 조회수2987
타지키스탄 철수 보고와 안식년 기도요청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그동안 주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하셨습니까? 변함없는 관심과 기도로 선교지의 잃어진 영혼들이 주님께 나아오고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아름답고 복된 일에 동역해 주시는 성도님들께 주님의 이름으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희들의 예고 없던 갑작스런 선교지 철수 소식으로 몽골에서부터 타지키스탄 선교까지 약 22년의 선교 여정에 기도와 물질로 동역해 주신 모임들과 성도님들에게 적지 않은 당혹과 궁금함을 드렸을 텐데 그간 사정을 알리지 못하고 이제야 소식을 전하게 되어 송구스런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부족한 저희 가정을 선교로 인도하시고 역사하신 그간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나누며 저희의 근황을 전하고 기도를 부탁 드리려 합니다. 1990년이 끝나가는 시점에 주님은 정글이나 사막과 같은 세계 속 오지에 태어난 연유로 평생에 복음 들을 한번의 기회도 없이 소망 없이 죽어가는 잃어진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저희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저희 마음에 떨칠 수 없는 부담으로 처음 자리를 잡더니 후에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저희를 1991년 겨울부터, 원시 부족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에 특화된 국제 선교 단체 NTM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끄셨습니다. 선교 훈련 후 정글 속 부족민들에 나아가고자 했던 저희들의 기대와 바램과는 달리 주님은 몽골로 저희 가정을 이끄셨고 1997년 4월 4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했습니다. 언어 공부 이후 주님은 몽골 여러 지방을 답사하게 하셨고 교통과 교육, 의료등 생활 환경의 열악함으로 인해 여전히 복음의 불모지로 남아있는 시골 지역에 대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결국 저희는 생필품을 3,4개월에 한번 울란바토르에 와서 조달해야 하는, 초원과 광야 길을 지도와 나침반에 의지하여 여분의 기름통을 차에 몇 개씩 싣고 다녀야 하는 몽골 오지 시골의 삶을 2000년 6월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채소 농사와 수확한 채소를 식생활에 활용하는 요리법을 가르치면서 이웃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 갔습니다. 운드르항에 정착한 후 2년 반, 몽골에 도착한 지는 5년 반이 지난 시점에 첫 성경 공부 그룹이 형성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성경에 대한 어떤 지식적 배경도 전무한 사람들이 인생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몽골 광야에 생명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장되어 갔습니다. 취업과 대학 진학, 이주와 같은 여러 이유로 해년 마다 운드르항 성도님들 특히 젊은이들이 울란바토르로 상경하였습니다. 그래서 울란바토르 교회 개척은 운드르항 교회 시작과 함께 기도되고 논의 되었습니다. 오랜 기도와 숙의 끝에 운드르항 모임의 장로 가운데 한분이셨던 바트에르튼 형제님과 저희 가정이 울란바토르 교회 개척을 위해 파송되었습니다. 그렇게 울란바토르 교회는 기존 상경해 있던 성도님들과 함께 2009년 시작되었습니다. 울란바토르 교회는 성도님들의 전도의 열심과 함께, 해마다 취업과 대학 진학으로 상경하는 운드르항 청년 형제 자매님들로 인해 빠르게 안정되고 성장했습니다. 또한 운드르항 성도님들 가운데 몇 분이 운드르항과 울란바타르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바그노르 라는 도시로 이주하셨고, 마침 그 도시에 바트에르튼 형제님의 친척이 살고 계셔서 성경 공부가 시작되고 그 결과 바그노르 모임이 탄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가정이 몽골에 처음 도착해서 운드르항에 내려갈 때까지 울란바토르에 3년 가까이 있었던 때에 관계를 형성했던 현지분들과 저희들의 울란바타르 상경으로 만남과 교제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날라흐 지역에 있던 일반 교회와 연결되고, 그들의 요청에 의해 시작된 성경 공부는 복음 증거와 구원 역사가 일어나고 교회 진리까지 가르치게 되면서 모임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2009년 울란바타르 모임 개척을 위해 운드르항 모임에서 바트에르튼 형제 가정과 함께 파송된 후 4년 만에 주님의 놀라운 역사와 인도하심으로 3개의 모임이 더해진 것입니다. 몽골 전역의 중소 도시들과 시골 여러 지역들에 훈련된 일군들을 파송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개척하는 소원을 기도로 주시고 인도하셨던 주님께서 그 역사를 이루시는 현장을 목도하고 동참하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름없고 멸시받던 몽골의 작은 마을 운드르항에서 시작된 복음과 교회의 역사를 마른 막대기와 같은 저희를 통해서도 이루시고 확장해 나가셨습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홍해를 가르는 장엄한 역사요, 광야에서 바위를 터뜨려 생수를 쏟아내시던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내 삶에서,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이어질 줄 알았습니다. 몽골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그 역사에 저희가 계속 동참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몽골 18개 도의 심장부와 몽골 남쪽의 고비 사막을 넘어 중국 내몽골까지 하나님의 깃발이, 교회가 세워지는, 전진의 역사를 몽골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이루어가자고 마음에 소원과 열정의 불을 타오르게 하고 기도의 손을 모았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저희의 기도와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2012년 여름, 매3년마다 갖는 안식년 기간을 맞아 파송 교회인 인덕원 모임에 왔습니다. 그때 인덕원 모임은 중앙 아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두 가정이 선출되었습니다. 파송 하기 전 교회는 중앙아시아 답사를 계획하였고 저에게 선교사의 경험과 안목이 필요하다며 동행을 부탁했습니다. 일주일 기간 동안에 키르키즈스탄과 타지키스탄 두 나라를 답사했습니다. 답사 마지막 밤 동행한 인덕원 장로 형제님은 조용히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진지한 어조로 저희 가정이 몽골을 떠나 타지키스탄으로 옮기는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몽골은 이미 4 교회가 세워져 있고 헌신된 현지 장로 형제님들이 사역을 잘 감당하고 계시고, 박수영 형제도 이제 몽골어를 어느 정도 하는 것 같으니 현지 몽골 장로 형제님들을 도와 함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가정이 몽골에 계속 있으면 사역은 효과적이고 빠르게 확장되겠지만, 우리 가정이 없다고 해서 사역이 멈추거나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타지키스탄에는 보낼 가정이 없어 시작도 못하고 키르키즈스탄에 보낼 두 가정은 형제의 도움이 절실하다 하셨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아니 파격적이기까지 한 뜻밖의 충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심지어 선교를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제안이다 싶었습니다. 몽골에서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확장되는 여러 사역들의 중심 축 역할을 감당하고 있고, 한국어로 복음과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몽골어가 더 편하게 여겨질 정도로 몽골어를 불편없이 구사하는 저를 다른 사역지로 그것도 언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 다른 나라로 옮긴다는 것은 처음에는 듣기에도 불편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처음 선교로 부르심을 입을 때부터 지금까지, 선교사로서의 저희의 역할을 지경을 넘어 잃어진 영혼들을 찾아나서는 주님과 교회의 발이라 믿어 왔습니다. 선교는 저희 개인의 사역일 수 없었고 교회의 사역이고 함께 순종하고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무엇보다 파송 교회인 인덕원 모임의 선교의 열정과 동역에 진심 감사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몽골 사역과 제 개인의 입장만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몽골을 처음 갔을 때와는 다르게 더 이상 젊지 않는 이 나이에 몽골을 떠나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다른 사역지로 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든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선교라는 거시적 측면과 함께 앞을 가름할 수 없는 두려운 이슬람 지역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떠나갈 젊은 두 가정과 타지키스탄의 영적 암울한 상황과 인덕원 모임의 달아오른 선교의 열망이 지속되기를 바라시는 장로 형제님들의 기대를 생각할 때 그 제안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의 잠 못 이루는 밤들과 내면의 극심한 갈등과 번민의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 사랑이 지금껏 저의 삶을 강권했습니다. 예수님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선교가 저의 목적과 원함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사는 것이 제가 원하는 삶이었습니다. 주님이 저를 선교로 부르셨기에 그 소명에 순종하여 기쁨으로 맡겨진 역할을 감당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떠나 저기로 가라 하시면 그곳이 어디라도 저희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빌2:17절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고백한 그 말씀을 이해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번제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 전제, 부어지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전제와 같이 드려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이 뜻하신 바이고,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의 섬김과 헌신의 삶에 보탬과 유익이 된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사도 바울의 심정은 그렇게 살고픈 저의 삶의 고백이고 다짐이었습니다. 내려놓으라 하시면 내려 놓는 것이 기쁨임을 고백했습니다. 내려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순종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인덕원 장로 형제님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장로 형제님들과 박수영 형제님이 그것에 한마음으로 동의하시고 일치하신다면 주님의 뜻으로 여기고 순종하겠다 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몽골을 떠나게 되었고 저희들에게 위임된 타지키스탄에 바로 가기 보다는 처음 선교지로 가는 두 형제 가정의 정착을 돕기 위해 키르키즈스탄에 동행했습니다. 키르키즈스탄에 약 2년 가까이 함께 하면서 두 가정의 정착을 돕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 후 2015년 8월 드디어 저희들의 새로운 선교지 타지키스탄에 입국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타지키스탄에 스위스 모임 선교사에 의해 새워진 타직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할 시점은 이미 스위스 선교사님 가정이 철수하신 지 1년 후였습니다. 현지 장로들이 세워지고 사역이 이양되어 철수 하신 것이 아니라 8명의 자녀들의 시급한 교육 문제로 인해 부득히 떠나시게 된 것이었습니다. 현지 리더 가정과 함께 한 마당 집에 살면서 저희들은 타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배울 수 없을 것 같던 타직어는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1년이 지나니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집에 살았기에 사생활이 노출되고 덕분에 서로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현지 성도들과 모임의 안타깝고 심각한 영적 상황을 인식하였습니다. 모슬렘 이웃들에게도 멸시 받는 삶이었습니다. 오랜 신앙 연륜에도 불구하고 가정에는 여전히 다툼과 불화가 끊이지 않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성도들 간에도 해결되지 않는 반목과 시기와 갈등의 골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말씀이 제대로 증거되지도 않고 듣는 사람도 없습니다. 집에서 말씀을 읽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만나 결혼한 믿음의 가정은 결혼한 첫날부터 다툼이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동네가 다 아는 문제 가정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허구헌 날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고 가정에는 고성과 울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그 가정은 5년 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자매는 4명의 아이들과 함께 선교사의 배려로 교회 사택에 살았습니다. 큰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분노조절 장애를 일으키고 화가 나면 몇 명의 어른들이 달라 들어 진정될 때까지 팔, 다리를 붙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저희들의 타직어는 턱없이 부족했고 어디서부터 손을 쓰고 시작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총체적 문제였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리더 가정부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성이 오가고 게으름은 묵은 일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거처와 생활비는 선교사를 통해 넉넉히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의 사랑과 연민이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예배당의 전기세와 수리비까지 철수한 선교사를 통해 여전히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매주 사랑 많은 선교사의 정기적인 전화와 안부 속에서 성도들 생활의 필요와 어려움은 기도 제목으로 전달되고 스위스 성도들의 사랑의 헌물은 구제비로 송금되고 있었습니다. 뼛속까지 심겨진, 사람을 의지하고 돈을 사랑하며, 세상 중심과 삶의 한복판에 이기심과 위선 가득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과 기도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저희 마음에 고통과 의분은 현지 실상을 알아갈수록 가중되었습니다. 한 집에 사는 모임의 리더인 라흐맛툴로 형제에게 언어 공부를 도와달라는 명목으로 매주 정기적 만남을 요청했고, 그 만남이 지속되는 어느 자연스런 시점에서 1년의 언어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지금까지 보고 인식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서서히 나누었습니다. 어둡고 무거운 얼굴로 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제 타직어가 부족해서 인가 싶어 매번 내 말의 의도를 이해하냐고 물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 했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는 매주 만날 때마다 지난 주 제가 교제한 내용이 자신의 마음을 계속 주장하고 괴롭혔다 하면서 성도의 바른 삶을 살고 싶다며 도와 달라 부탁했습니다. 일주일 한번 가졌던 형제와의 모임은 결국 매일 만나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형제의 삶에 가정과 주변에서 인식할 정도로 변화가 나타나고 주일 증거하는 말씀에 묵중한 힘이 실렸습니다. 저와 교제하면서 받아 적은 내용들은 어김없이 매 주일 말씀으로 증거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형제에게 찾아와 달라진 메시지와 변화된 삶의 모습에 대한 원인을 물었습니다. 모슬렘으로 있다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 부인과 아이들이 떠난 충격과 친형의 학대와 협박으로 정신 이상 현상을 드러내고 정신병원에 두 차례 수용된 전력이 있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퇴원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지도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관련약물을 복용하고 가끔 이상 증상들을 보여 교회에서 경계와 주의를 받고 있는 형제였습니다. 이 형제님이 제일 먼저 라흐맛툴로 형제에게 찾아오셨고 형제님은 저에게 이 형제님을 만나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매주 계속되는 교제에서 주님의 은혜로 안정과 괄목할 만한 변화와 진보를 보이신 형제님은 지금은 모임을 섬기시는 형제님들 가운데 한 분으로까지 성장하셨습니다. 가정의 불화와 부모의 오랜 별거로 인해 사춘기에 들어서자 분노 조절 장애를 보이며 주변에 고통과 우려를 주고 있는 한 학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담을 주님이 저의 마음에 주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여 만남을 제안했고 매주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났을 무렵에 부모가 따로 저희를 찾아서 저를 만나 이후 아들의 놀라운 변화를 언급하며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아들의 분노 조절 장애와 성격 파탄 원인과 이유의 상당은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의 아버지를, 아내는 어머니와 정기적인 만남을 제안했고 또 그렇게 몇 달이 지났습니다. 학생의 부모가 자신들의 모습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자녀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가한 죄악을 인식하며 주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변화와 회복을 구했습니다. 저희 부부와 함께 부부가 만나기 시작했고 주님의 은혜와 회복의 역사는 그 가정에 큰 선물로 임하여 2017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5년의 별거 생활을 청산하고 한 지붕 아래 완전체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학생은 작년 가을 대학에 진학했고 가정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웃음과 사랑 가득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듯 계속 가정들과 청년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아내도 정기적인 자매들 만남을 시작하고 개인적으로도 매일 만나 자매님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일군 양성을 목적으로 5명의 형제들을 선출했고 매주 목요일 모였습니다. 지금은 그 가운데 세 형제들이 주일 말씀을 교대로 증거하고 있으며, 연합하여 모임을 돌보고 섬기고 있습니다. 부족한 저희의 언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역사는 저희의 능력과 기대 이상으로 임했습니다. 20년 가까운 오랜 신앙 생활에도, 그간 수많은 선교사들을 만나 가르침과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참 의미와 실재를 알게 되었다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자신들을 위해 우리 가정을 몽골에서 이곳으로 급히 옮기게 하셨다고 감사했습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은 연약하고 부족한 저희 가정을 사용하셔서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에 감격하고 찬송과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드립니다. 타지키스탄에 뼈를 묻지는 않을 지라도 갈수록 줄어만 가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들은 다 뿌리고 떠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획은 다르셨습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에 몽골을 떠나 타지키스탄으로 옮기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듯이 주님은 작년 2018년 안식년 기간 동안에 선교사로서의 저희의 삶을 이제 정리하게 하시고 한국으로 인도하심을 여러 모양과 방식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선교로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선교 훈련을 위해 1991년 한국을 떠나는 것을 기점으로 그간 어디서나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다가 2018년 9월 26일 선교지를 최종 철수 해서 한국에 이제는 안식년으로서가 아닌 정착을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가정의 근 22년의 선교지 삶 동안 기도와 물질로 충성된 동역으로 함께 해 오신 인덕원 모임을 주님은 한국에 온 지 한달 만에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2019년 새해 1월 5일에 남세종 모임의 제안으로 한국에서 재적응을 위한 마지막 안식년 기간을 갖도록 허락하셨습니다. 2019년 8월까지 남세종 모임에서 안식년을 가지면서 저희의 진로에 대한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며 기다리려 합니다. 저희의 한국에서 적응과 정착을 위해 그리고 저희 가정에 계획하신 이 후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그간 저희 가정을 신뢰하시고 동역해 주신 것처럼 기도 가운데 저희 가정을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에서 소외된 세상의 잃어진 영혼들이 주님의 품에 발견되는 영광되고 복된 선교 사역에, 주님의 은혜와 인덕원 모임을 비롯해서 전국의 모임들과 성도님들의 충성된 동역과 사랑이 있었기에 저희들은 몽골과 타지키스탄에서 그간의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주님과 몸 된 교회의 발과 그 손에 들려진 막대기였습니다. 그 영광되고 복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기도와 동역으로 가능하게 해 주신 주님과 교회들에 깊은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올 한해에도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과 성도님들 각 개인 개인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한번 깊은 저희 가정의 감사와 존중과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빌3:13-14) 계속되는 믿음의 여정을 소원하고 추구하는, 정 광원, 주 미숙, 이레, 진호, 에스더 드림. 2019년 1월 11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