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형제단 8. (세 부류 전통을 배경으로 발생한 형제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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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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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류 전통을 배경으로 발생한 형제운동
 

기독교형제단이 출현하도록 한, 형제운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형제단은 브리튼 제도 내의 종교적 상황 가운데서 당시의 당면한 교회 문제를 개혁하고자 하는 신앙 운동의 결과로 발생하였습니다. 그 운동을 형제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성직 계급을 거부하고,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서로가 형제, 자매로만 여기길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단순한 교회라는 공감대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먼저 형제단이 어떻게 다양한 전통에서 형성되었는가를 살펴본 다음 초기 인물들의 신학을 중심으로 형제단 사상의 요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형제단의 초기 지도자들의 출신 전통을 연구한 결과 대략 세 부류의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 전통들은 영국국교회 전통, 침례교회 전통, 그리고 퀘이커 전통입니다.
 


1) 영국국교회 전통
   대부분의 영국인이 소속한 교회 전통이 영국국교회 전통인 것과 같이 형제운동의 주역 중 적잖은 이들은 영국국교회에 속한 이들이었거나 그 교회의 목회자들이었습니다. 영국국교회에 속했던 이들에 의해 형성된 형제단의 중심지는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e)과 잉글랜드 남부의 플리머스(Plymouth)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모두 영국국교회 출신이며, 두 도시에만 국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핵심 인물을 비롯한 주류 인사들이 형제운동을 시작하거나 합류하기 전에 몸담았던 전통이 영국국교회였으며, 더블린과 플리머스에서 주목할 만한 형제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분명합니다.

   (1) 더블린(Dublin)
       기독교형제단이 곧잘 ‘플리머스 형제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그 운동은 플리머스가 아니라 더블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형제운동의 정신으로 주의 만찬이 처음 구체적 형태로 시작된 곳은 더블린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블린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복수의 무리들의 통합, 그리고 합류의 과정을 통해 영국국교회 전통에서 형제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세 개의 주의 만찬 모임은 첫째, 에드워드 크로닌(Edward Cronin, 1801-1882)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임이 있었고, 둘째, 앤서니 노리스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 1795-1853)의 영향으로 주의 만찬을 행하는 모임, 셋째, 세 사람이 주의 만찬을 행하던 작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중 두 번째 모임은 1827년 부활절 기간에 엑서터에서 치과 의원을 하고 있던 그로브스가 자신이 참여하던 기도 및 성경 공부 모임에서 떡을 뗄 자유, 즉 주의 만찬을 행할 자유를 제안함으로 주의 만찬을 행했습니다. 주의 만찬은 이른바 최후의 만찬으로 알려진, 예수님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 기념 식사 자리에서 제정하신 것으로 성만찬이란 용어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 영국국교회에서는 아무나, 그리고 아무데서나 주의 만찬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주의 만찬은 안수받은 사제가 집례해야 하며, 국교회 법이 인정하는 국교회의 공식 예배에서 합당한 절차에 따라 집행해야 했습니다. 그로브스의 제안을 들은 이들은 강한 공감을 표했고, 이러한 정신으로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떡을 떼는(주의 만찬) 새로운 모임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로브스는 영국국교회의 39개 조항 중 병역을 승인하는 조항이 있는 것 때문에 영국국교회의 지침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전쟁을 승인하는 영국국교회에서 안수받는 것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로브스는 영국국교회에서 안수받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로브스가 깨닫고 설파한 개념이 ‘사역의 자유’입니다.
이후 형제단의 대표적 인물들은 신자들의 ‘사역의 자유’를 지향함으로 루터의 전신자 사제론을 뛰어넘어 ‘전신자 사역자론’을 외쳤습니다. 그의 제안은 그가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동료들이 공감하고 추구해 나가는 형제단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더블린에서 주의 만찬을 행하던 두 모임, 즉 크로닌의 무리와 벨렛의 모임은 그로브스가 제안한 주의 만찬을 행할 자유와 사역의 자유에 대해 공감하면서 연합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모임이 기존의 연합 모임에 합류했습니다. 1829년입니다.
이상과 같이 형제단은 한 무리, 또는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자생한 별도의 무리들이 하나로 연합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구심점은 그리스도인의 연합이라는 정신과 그것을 가시화한다고 믿은 ‘떡을 떼는 모임’(주의 만찬)이었습니다.

   (2) 플리머스(Plymouth)
      잉글랜드의 플리머스에서는 예언학회로 시작된 모임이 형제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옥스퍼드 퀸스 학부에서 공부한 조지 위그램은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방문하여 파워스코트 학회(Powerscourt Conference)에 참석한 이들과의 교제를 통해 예언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플리머스에서도 예언 강의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던 예배당을 구입하여 1832년 1월에 모임을 가졌습니다. 첫 모임에서 주의 만찬은 원래 예정에 없었으나, 위그램이 주도하여 갑작스럽게 시행되었습니다. 그 모임은 사실상 예언 강의가 그 초점이었고 참석자 중에 다비와 해리스는 영국국교회 사제였기 때문에 분리된 교회로서의 예배 성격을 띠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플리머스 롤리가에서 모인 예언 연구 및 만찬 모임은 교회로 발전하여 1840년에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약 천 명에 이르게 되어, 에브링턴가(Ebrington Street)로 모임 장소를 옮겼습니다. 플리머스의 교회는 형제단 교회 중에 가장 큰 규모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계에서 주목할 만한 규모였기에 형제단을 지칭하는 대표적 이름이 “플리머스 형제단”이 되었습니다.
 


2) 침례교회 전통
   브리스톨과 반스테플에 있던 침례교회 회중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더 성경적인 모습을 나타내길 기대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연합,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 모든 신자가 제사장으로서 차별 없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을 그 표지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초기 침례교회의 전통에 대한 향수와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하고자 하는 동기로 인하여 침례교회를 떠나 형제단에 연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1) 브리스톨(Bristol)
      더블린에서의 형제운동 형성기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로브스는 침례교 목사였던 크레이크와 뮐러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로브스와 인간적으로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크레이크는 그로브스 가정의 가정교사였고, 뮐러는 그로브스의 누이와 결혼했습니다. 크레이크와 뮐러 모두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그로브스의 삶에 감동했고 그의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침례교회 목사들이었지만, 크레이크와 뮐러는 매주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과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참여자들이 제한이나 정해진 규칙 없이 자유롭게 기도나 발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신자들이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형제운동의 핵심 가치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뮐러와 크레이크는 기드온 침례교회 사역에 더하여 베데스다의 새로운 회중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동의한 회중과 더불어 베데스다 교회 사역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1835년 말부터 뮐러는 브리스톨에서 고아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역은 그가 세운 ‘국내외 성경 지식 협회’(The Scriptural Knowledge Institution for Home and Abroad)에서 출발했습니다. 뮐러는 사람에게 요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공급하심으로 필요를 충당하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2) 반스테플(Barnstaple)
      뮐러와 크레이크 외에 침례교회 출신으로 형제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반스테플의 침례교회 목사였던 로버트 클리버 채프먼(Robert Cleaver Chapman)입니다. 초기 형제단이 큰 성장을 이루었던 지역인 데본셔(Devonshire)주에서 플리머스 지역 외에 형제단의 또 다른 근거지는 반스테플(Barnstaple)과 그 주변 지역이었습니다. 반스테플의 채프먼과 인근 시골 지역의 로버트 그리블(Robert Gribble)은 형제운동 발전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했습니다.
채프먼은 뮐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긴밀하게 교류하였고, 뮐러와 크레이크가 취한 태도와 같이 모든 교파를 초월해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이루기를 소망하였으며, 그가 섬기는 교회가 그러한 기조로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채프먼은 침례교회 목사였지만, 형제단의 지향점과 유사한 사상을 가진 에반스의 영향을 받았고, 헤이크를 통해 뮐러와 친분을 갖게 되면서 형제단과 연결되었습니다.
 


3) 퀘이커 전통
   약 1790년부터 퀘이커 진영 내부에서 신비주의적 경향에 반대하고 성서의 권위를 존중하고 성서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따르고자 하는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827∼1828년에 북아메리카의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ds)는 극단적으로 신비주의적인 엘리아스 힉스(Elias Hicks)의 가르침에 의해 분열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퀘이커교도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북아메리카 퀘이커교도 3분의 1 정도는 힉스를 추종하면서 친우회를 떠났습니다. 1829년에 친우회의 런던 연례회의에서 힉스의 가르침이 정죄 되었지만, 영국에서 정적주의자(Quietist)들과 그에 반발하는 사람들간의 긴장은 고조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의 갈등은 결국, 성서의 권위를 우선시하는 이들의 이탈로 이어졌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형제단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형제운동은 19세기 초 영국의 영적 상황 가운데서 새로운 신앙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이 다양한 교파에서 나와서 공통 가치 안에 연합하면서 발행하였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세 개의 기독교 전통이 있는데, 영국국교회 전통, 침례교회 전통, 퀘이커 전통입니다. 영국국교회의 복음주의자들, 침례교 목사들, 퀘이커 복음주의자들이 초기 형제단의 주요 멤버였고, 각 전통의 특징이 형제단 내에 나타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비개방적 형제단의 주류가 된 인사들은 대부분 영국국교회 출신들이었는데, 중앙집권적 교회형태와 유아세례를 행한 것등이 국교회 전통과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방적 형제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침례교회 출신들이었는데, 지역교회의 독립성, 신자의 침례를 강조하면서 유아세례를 배격한 것은 침례교회 전통과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퀘이커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계획을 세우거나 준비하는 것을 인위적인 것으로 보아 거부하고 무계획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입장은 퀘이커 교도들의 유입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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