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 알림이
- 작성일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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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 18:14)”
나이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는 자기 집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쯤 그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는 이제 89세 내년이면 90세가 된다. 90세의 여인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라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도 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이다. 창세기 18장은 시작과 함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해준다(1). 아브라함도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를 여호와로 인식했다. 아브라함은 그를 ‘주’라고 불렀다(3). 물론 ‘주’(아도나이)는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왕을 지칭하거나 종이 주인을 부를 때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이야기할 때도 ‘주’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18장 문맥의 흐름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이 언급한 ‘주’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기 위해(출 20:7) 여호와(יהוה)라는 단어를 ‘주(אֲדֹנָי : 아도나이)’라고 발음했다. 또한, 책망받았던 사라도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도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이야기를 믿어야 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점점 확고해지며 명확해지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큰 민족”을 그는 믿었으나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지에 대해서는 안개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아브라함이 생각해 낸 첫 번째는 그의 종 엘리에셀을 통해 상속자를 삼는 거였다(15:2). 두 번째는 그의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이었다(17:18).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17:19).
큰 민족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 아브라함은 이제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자기와 사라를 통해 태어날 아이를 통해 민족이 일어날 것이다. 그의 아내가 비록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분이심을 알았다. 그에게 또다시 언급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받았다(18:10). 그러나 아직 문제가 있었다. 그와 함께 할 사라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장막 어귀에서 듣고 있는 사라의 웃음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4).” 웃음기가 사라진 사라는 오히려 두려움이 임했다. 그는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두려움을 느꼈으나 이것이 그에게 참된 믿음의 길이 되었다. 하나님은 창세기를 통해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 어떻게 굳건해지는지를 보여주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아브라함과 사라의 차이는 언약의 말씀을 어떻게 인식했느냐의 차이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명확하지는 않지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사라는 그 언약의 말씀은 잘 인식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그와 음식을 나눈 장면은 그의 백성에게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자주 나타난다. 기드온(삿 6:14-21), 삼손(삿 13:8-20) 그리고 예수님도 최후의 만찬을 통해 자기의 죽으심을 명확하게 하셨다. 아브라함도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께 정확한 약속을 받았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고 있던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이해했으나 사라는 그렇지 못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도 들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 놀라운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너무도 큰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점점 삶의 현실 속에서 믿음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신음하는 때도 많았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믿음의 부족이며 결국 말씀을 듣는 것의 부족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수많은 의문이 일어나고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된다. 어떻게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죽었던 나사로는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왜 지금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내가 만약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지금의 내 신앙이 놀랍게 변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기적을 체험하면 신앙이 좋아질까? 나병의 고침을 받았던 10명 중 예수님께 다시 찾아온 사람은 이방인 한 명에 불과했다(눅 17:12-19). 그런데 그는 병의 고침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 그것은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가끔 놓치는 것은 나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를 잊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나 사람을 물 위로 걷게 만드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든 원리와 물질의 상태를 아시는 분이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심지어 인간을 만들기도 하신다. 그런데 그 만들었던 인간이 죄에 빠지게 되었을 때는 그 죄를 말씀만으로 해결하실 수 없었다. 죄는 반드시 그 삯이 지불되어야 한다는(롬 6:23) 말씀을 지켜야 했다. 결국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일을 실질적으로 실행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구원의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얻어진다. 뿌연 안개와 같았던 것들이 읽으면 읽을수록 명확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신 30:11).”
하워드 헨드릭스는 그의 저서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연구’에서 한 예화를 언급한다. 제시카는 성경을 잘 알고 싶어 연구를 시작했으나 “저는 헬라어, 히브리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또 그 책들에 적혀 있는 성경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해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헨드릭스는 “공부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군요.”라고 대답하였다.
이과적 성향인 필자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외우는 데 어려움이 있다. 성경도 해석하는 방법을 몰랐을 때 성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구약은 너무도 힘들었다. 제시카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공부하게 된 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지금은 성경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더 나은 해석을 위해서는 원어를 아는 것도 중요하나(그것은 학자들에게 맡겨도 된다), 만약 우리가 원어를 알아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번역본이 아닌 원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세계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한 단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문맥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 의미를 찾게 되면 충분하다. 신약성경은 당시 ‘코이네 헬라어’라는 평민들의 언어로 적혔다. 평민들도 누구나 글을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는 2,000년 전(신약을 기준으로)에 말씀하신 내용을 보는 것이라 그 당시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역사, 문화, 문맥, 문법 등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성경이 어려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금의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지금은 좋은 많은 책들이 있다. (물론 책을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기초를 쌓고 교리를 바로 배우며, 성경을 해석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내가 성경을 해석할 힘이 있을 때 말씀은 더욱 풍성해진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하나님께서 능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과 같이 그분의 약속이 더욱 명확하게 보여야 한다. 그는 결국 100세에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면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도 성경이 나의 삶에 실체가 되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이 실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바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증거가 된다. 반드시 이루어진다.
내가 매일 성경을 묵상할 때 성경은 내게 실체가 되도록 도와준다. 글로 적혀 있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게 해 준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성경을 관찰하고 해석했다면 이제는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성경을 잘 알지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적용이 없는 사람이다. 성경은 행하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도 그 마지막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바르게 성경을 관찰하고 해석해야 한다. 바른 관찰이 없이 바른 해석이 없다. 바른 해석이 없이 바른 적용도 없다. 바른 해석이 되었다면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적용은 오늘 마칠 수 있어야 한다. 저녁에 검수할 수 있어야 한다. 뜬구름과 같이 “앞으로는 성경을 읽어야지”라는 적용은 결국 아무것도 안 할 때가 많다. “오늘 마태복음 ○장을 읽어야지”라는 명확한 적용이 필요하다. ‘사랑하자’라는 적용도 너무 광범위하다. “오늘 만나는 ○○씨에게 ○○을 도와주어야지”라는 명확한 적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저녁에 검사해 본다면 나의 적용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시간이 하루, 한 달, 일 년이 지난다면 나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물론 이 모든 적용에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헨드릭스는 자기의 책에서 “한번은 온 가족과 함께 몇 주를 거쳐서 말씀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성경을 배우기 위해 2,000km의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그는 성경을 배우는 열정을 보였으나 과연 그가 이러한 열정으로 자기 집 거실에 놓인 성경을 집어 들고, 직접 말씀 속에 빠지기를 원하는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책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들었던 말씀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느냐’이다.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어떤 결과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나 나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은 매일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삶이다. 이런 삶이 진정한 기적을 일으킨다. 성령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며 놀라운 은혜로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께는 능하지 못한 일이 없으시다”
by. 임현성 (성남북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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